내 유일무이한 여동생 JC는 82년생 4월생이다. 오빠인 나와는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까지 한 집에서 지냈지만 JC와의 추억은 국민학교 시절이 대부분이다. 같은 학교에 다녔고, 같이 동네에서 뛰어놀았기 때문일 것이다. 동네에서 순해빠진 오빠를 구해주느라 고생 꾀나 한 JC를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다. 우리 집은 비교적 가부장적이었는데, 다른 집에 비해 격식이나 예의를 중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할아버지께 걸려온 전화를 받으시며 (수화기에 대고) 집에 없다고 해야 하는 상황에 계신다고 말했다가 엄청 핀잔을 들었던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때그때 눈치껏 하루하루를 버텨가는 집안임에 틀림없었다. 그 가부장적인 집안이라 함은 할아버지 중심이라 대신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여자들에 비해 남자인 아버지와 삼촌들 그리고 나는 집안 살림으로부터 자유로웠다. 반대로 어머니는 이 집안의 모든 안살림을 맡아서 하셨고, 그에 따른 모든 책임을 지셨다. 그 고생은 아무것도 모르고 시집온 죄(?)밖엔 없을 것 같다. 다른 여자였던 할머니는 입으로만 일하셨으며, 가끔은 어머니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할머니 앞에서 울면서 빌다시피 하는 광경을 몇 번 목격하기도 했다. 여동생 JC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차별을 겪었다. 나보다 공부를 잘해도, 그림을 잘 그리거나 운동경기에서 입상하여 상을 타와도 칭찬을 듣지 못했다. 심지어 어느 해는 나와 동생 모두 학급 반장을 하게 되었는데, 어머니는 나를 챙기시느라 JC는 다른 분에게 대신 맡기기도 하셨다. 하지만 JC는 정말 씩씩하게 잘 자라났다. 보란 듯이 중·고등학교 다닐 때 방송반 PD와 신문반 편집장을 하기도 했고, 오빠보다 공부도 곧잘 하였다. 어쩌면 JC는 좋은 성과를 내도 특별한 기대를 할 수 없는 집을 떠나 일찌감치 홀로서기를 꿈꾸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는 외국에 나가 교포생활을 하고 있는 JC와는 간간이 통화를 통해 안부 전하고 있다. 듣다 보면 거기도 차별은 여전한 듯하다. 대부분 7,80년대 이민오신 분들이 많은데, 지금 한국의 변화한 가치관은 먼 나라 얘기이고, 고국을 떠나오던 시절의 사고에 머물러서 그런 교육을 받고 성장한 교포사회의 2, 3세들 또한 비슷한 영향을 받고 있더란다. 거기다가 인종차별까지 감내해야 하니 그 고충을 이루 말하기 힘든 것 같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김지영의 어린 시절은 여동생 JC와 어머니의 삶을 떠올리게 하였고, 직장 생활하던 중 결혼하고 출산 후 육아까지의 모습은 아내 AS가 교차되어 나타났다.
AS가 잘 다니던 직장에서 출산 휴가를 받아 퇴근하던 날이 기억난다.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 집 앞 호프집에서 간단히 안주를 먹으며 그동안 열심히 성과도 내고 보람도 느꼈을 텐데 출산을 이유로 앞 날을 기약할 수 없음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과, 아이가 태어난 후 새로운 일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힘들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이제 남편의 벌이에 의존하여 돈을 타 쓰는 입장이 되었다는 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으리라. 첫 아이는 아들이었는데, 양가 집에 육아의 손을 빌릴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만 잘 기르기로 작정했다. 만일 첫 째가 딸이었다면 그 부담은 어땠을까 가히 짐작하기 힘들다. 다행히 AS는 큰 우울증 없이 육아를 잘 거쳤고, 아이가 어느 정도 커서 여유시간이 생기니 사회생활을 도모하고 있다. 그런데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자신의 적성과 상관없는 일을 해야 하고, 본인의 능력보다 하향지원하여야 하는 현실이 너무나 일반적이다. 가끔은 나도 여자가 집에 있으면 당연히 집안일하고 아이를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쩌다 한, 두 번 보여주기 식으로 설거지나 청소를 하고 휴일엔 애써 낮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런데 여자들은 집안일을 하기 위해서, 독박육아를 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왜 사람을 있는 대로 보지 못하고 심지어 가족마저도 아전인수격으로 행동했는지 부끄러웠다. 그리고 동생 JC가 어린 시절 겪었을 고통을 미처 바라보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많은 논란 가운데 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도 남성편향사회에 던지는 불편한 진실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주하기 힘들지 않았을까. 남자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미 한국사회에 깊게 길들여진 여자들 마저도 그러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내 딸과 내 손녀는 다른 사회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지금 함께 해답을 모색하고자 하는 작은 움직임이 언젠가는 큰 인식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지난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최소한의 양심으로나마 이 책 한 권을 빌어 나의 관성과 같은 일상에 작은 균열이 생겼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또 다른 김지영들이 여자로서 정당한 권리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하고 행동해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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